컬쳐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은 죽었다?" 강애란이 밝히는 책의 미래

 "책은 사유의 장치이자 감각의 매체다." 이 말은 '빛이 나는 책'을 만들어 온 미디어 작가 강애란 이화여대 서양화과 교수의 예술 철학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지난 40년간 작업 궤적을 총망라하는 대규모 전시가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수림큐브에서 열린다.

 

유아트랩서울이 주최하는 강애란 작가의 개인전 '사유하는 책, 빛의 서재: 강애란 1985–2025'는 오는 17일부터 5월 31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디지털 시대의 예술과 기억, 여성성과 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작가의 작업세계를 폭넓게 아우른다. 특히 '라이팅북'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설치는 예술성과 기술적 실험을 결합한 새로운 전시 형식으로, 관람객들이 빛과 공간으로 구현된 서사 속을 유영하듯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수림큐브의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40년 작업 흐름에 맞춰 총 7개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미러 효과를 통해 천장과 바닥으로 확장된 설치물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리며, 마치 책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독특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전시는 작가의 예술 여정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는 구성이다. 지하 1층에는 1980~1990년대 사이 제작된 석판화와 보따리 주조(casting) 연작 등 초기작업이 전시된다. 이 시기 작품들은 강애란 작가가 예술적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층은 2016년 이후 발표된 라이팅북(Lighting Book) 시리즈와 VR 설치,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업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 공간에서는 디지털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다. 빛을 발하는 책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 매체를 넘어 감각적 체험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2층은 미디어 캔버스 페인팅(Media Canvas Painting), 하이퍼북(Hyper Book), 영상 설치 등 책과 기술의 인터페이스 실험이 펼쳐진다. 전통적인 회화와 첨단 디지털 기술의 결합은 관람객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3층은 라이팅북과 강애란의 자전적 아카이브를 통해 책의 존재론적 확장을 사유하는 공간으로 연출된다. 이곳에서는 1986년부터 2025년까지의 다양한 자료와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사유 과정과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정면의 가장 큰 벽에는 20세기 한국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삶을 살았던 근현대사의 여성들(나혜석, 김일엽, 최승희, 윤심덕, 위안부 등)의 책을 다루는 작품이 전시된다. 이 작업은 이들의 삶의 궤적과 그에 대한 사유를 책이라는 매체로 재구성해 여성 주체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시각적으로 되살려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전시를 기획한 유아트랩서울의 이승아 큐레이터는 "강애란 작가는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기억과 역사, 여성성과 기술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며 "이번 전시는 단순한 회고전을 넘어 디지털 시대에 책이라는 매체가 갖는 의미와 가능성을 새롭게 조명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관람객이 직접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책이 가진 다층적 의미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빛으로 구현된 책의 세계는 우리에게 지식과 정보를 넘어선 감각적 경험과 사유의 확장을 선사할 것이다.